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원서(元瑞), 호는 운호(雲湖). 아버지는 도희(道熙)이다.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와 신학교(神學校)를 졸업하고 기독교 목사를 지냈다. 1907년 홍주의진에 참가해 운량관(運糧官)으로 활동했으며, 1911년에는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지하단체인 신조선당(新朝鮮黨)을 조직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이 발표되자 같은 해 3월 20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 13도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해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를 조직하고 평정관(評政官)에 선출되었다. 서울 독립단 본부특파원으로 같은 해 4월 10일 상하이[上海]에 도착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상임위원회 청원위원이 되었다. 국채통칙(國債通則) 및 국채발행조례(國債發行條例)를 통과시키는 등 의정원 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상해한인청년단의 서무부장 겸 비서부원으로 활동했다. 1927년에는 국내에서 안재홍(安在鴻)·조병옥(趙炳玉)·홍명희(洪命熹) 등이 조직한 신간회(新幹會) 경동지회위원장으로 취임해 활동했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재무부장을 지냈으며,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대한국민당최고위원, 순국선열유가족조사위원장, 충국열사기념사업회장, 대한기독교반공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